사설, 갑질문화,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구조화된 권력의 일상성
사설, 갑질문화,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구조화된 권력의 일상성
  • 연합매일신문
  • 승인 2018.11.2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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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디스크 양진호 회장의 갑질폭행을 보도하는 뉴스 장면 캡쳐
위디스크 양진호 회장의 갑질폭행을 보도하는 뉴스 장면 캡쳐

 

거두절미하고 팩트차원에서 초등학교 3학년생이 했다는 발언부터 들어보자.

“이 아저씨가 괴물인가, 바본가.//일단은 잘못된게 니 엄마, 아빠가 널 교육을 잘못시키고 이상했던거야.//돈 벌거면 똑바로 벌어.//아저씨 진짜 해고당하게 아저씨 죽으면 좋겠어. 그게 내 소원이야. 아저씨 죽어라. 죽으면 좋겠어.” 족벌언론 사주의 손녀이자 티비조선 방정오 전무의 딸이 운전기사에게 했다는 녹취록의 일부이다. 초등학생 열 살짜리 아이가 57세의 어른에게 한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경악할 일이다.

갑질이 사회적 문제로 제기된 것은 시민의식 각성의 과정

요즘, 이른바 ‘갑질’(甲질, 깝질, Overuse one's power)사례가 연일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갑질은 권한을 가진 자(甲)와 그 권한을 수용해야 하는 자(乙)와의 사이에서 불공평하게 형성된 부당한 사회적 관계와 그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부당한 관계는 미시적으로는 개인간의 문제일수도 있고, 거시적으로는 사회구조가 파생시킨 권력관계가 본질일 수 있다.

봉건왕조시기 갑질의 가해자이자 주체는 봉건세력이며, 수용자이자 피해자는 피지배층인 백성이었다. 그러나, 이는 갑질이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계급지배 사회에서 ‘필연적인 관계’의 일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갑질은 시민사회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채 급격하게 자본주의화 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개화(改化)가 덜 된 전(Pre)근대적 신분의식의 발로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자행되는 갑질은 ‘(외형적으로는) 상호 동등해야 할 시민’에게 가해지며, 구조에 의해서 은폐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갑질은 계급권력에 기반을 두어 구조화되고 재생산되는 ‘지배-피지배 관계의 일상성’(日常性)이라고 할 수 있다.

갑질은 평등해야 할 인간관계를 권력관계로 착각한데서 비롯하여

갑질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내면화된 차별의식이 곧장 차별적 행위로서 드러날 때이다. 권력자의 갑질은 억눌려진 시민들의 감정선을 즉발적으로 건드리고, 서민대중의 공분을 살 때에만 사건화된다. 사회적 지위(권위, 권력, 권한 등), 사회적 격차(빈부·학력·학벌 등), 문화 및 개인적 차이(지역·연령·성별 등), 가족 내 서열로 인한 갑질 등은 관례나 문화로 치부되기 쉽다. 이러한 갑질은 스스로 내면화되기 때문에 구조속에서 은폐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갑질은 우리들의 삶속에 시나브로 깊이 체화(體化)되어 있다.

자본주의하에서 ‘시민’(市民; Citizen)들은 형식적·법률적 측면에서 최소한으로라도 평등한 관계일까? 아니다. 시민들은 그 내부적 층위에 따라 배제당하고, 구분당하고, 식별 당한다. 시민들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경계(境界)와 제한(制限)을 당한채 갑질을 당하고 있다. 다만, 관습화된 일상으로 인해 갑질권력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대항하지 못할 뿐이다. 여기에 시민, 민주주의, 인간에 대한 존중, 약자에 대한 연민과 같은 사회적 정의(正義; Justice)는 끼어들 틈조차 없다.

갑질은 자본주의의 구조화된 부패권력의 일상성

현대 자본주의하에서 갑질을 저지르는 주체는 세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자본과 권력을 다가지고 있지만 인성(人性)이 싸구려인 졸부들, 두 번째 부류는 자기 자신도 을이면서 갑으로 착각하고자 하는 자아가 전도(顚倒)된 개인, 세 번째는 부당한 구조속에서 재생산되는 사회제도에 기반한 갑질이다.

위디스크, 파일노리의 사주 양진호 회장의 사례에서 보듯, 갑질은 갑질주체의 극단화된 특권의식, 선민의식(選民儀式)에 기반한 것이다. 양진호는 피해자에게 자신의 권위를 강요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동물적 감정을 폭발시키고, 피해자와의 화해와 합의조차 폭력적으로 강박한다. 갑질 피해자의 물리적,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인 모든 인격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있다는 착각이 아니라면 이러한 범죄 행위는 설명될 수 없다. 양진호가 망상(妄想)속에 스스로 세팅한 시·공간은 인간세계가 아닌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이다.

최근 사례만 보더라도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이미 자행되고 있었다. 인분먹이기, 야구방망이, 최루가스, 전기충격기, 쓰싸(슬리퍼로 싸대기를 때리기)로 유명해진 강남대 장호현 전교수의 갑질(2015년)은 다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대한항공 조현아의 땅콩회항(2014년), 조현민의 물벼락, 모친 이명희의 막말폭행, 조현태의 부정입학, 조양호의 갑질은 가히 패밀리 세트급이다.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은 이쯤되면 가풍이자, 집안내력이라 할 만 하다.

이 외에도 언론에 보도된 사례만도 무궁무진하다. 아버지의 아들사랑 정을 오롯이 보여준 한국화약 김승현 회장(2007년), 방망이 한 대에 100만원 매값폭행(M&M, 2010년), 청부살인과 횡령(피죤, 2011년),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밀어내기 강매(남양유업, 2013년), 승무원 폭행 라면 갑질(포스코에너지 임원, 2013년), 신문지로 승무원 폭행(블랙야크, 2013년), 운전기사 등 직원에 대한 폭언·폭행(호식이 두마리치킨, 미스터 피자, 몽고식품, 대림건설, 현대BNG스틸, 총각내 야채가게, 셀트리온 등) 등 헤아릴 수 조차 없다.

이러한 갑질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하거나 ‘강림’(降臨)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갑질사례가 계속하여 발생하는 것은, 그동안 없던 갑질이 갑자기 드러난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와 적폐에 가려 은폐되어 있다가 햇빛에 봄눈 녹듯이 드러난 것이다.

갑질 가해자 개인에 대한 비난만으로는 문제해결 난망

한국사회의 갑질은 당사자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갑질은 개인문제가 아니라 거시적·구조적 사회문제인 까닭이다. 갑질은 인격적으로 동등해야 할 사회적 관계를 ‘주인과 노예’와 같은 전근대적 지배-예속관계로 환원시켜 권력관계로 발현되는 패권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 갑질은 한국사회의 압축적이고 폭압적인 발전과정의 단면을 보여주는 전형이자, 사회의 거시적인 구조와 맥락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언론에서 경쟁적으로 기사화하는 갑질논란은 감정선만 건드리는 대단히 표피적인 접근이다. 당사자에 대한 비난성 중계보도는 오히려 TMI(과잉보도; Too Much Information)의 성격이 강하다. 개인에만 집중되는 인신공격성 보도는 “한 놈만 패고”, “약한 놈만 골라패는”, 기회주의 언론의 도발이고 갓차저널리즘(Gotcha; “너 딱 걸렸어”)이자 도색잡지(桃色雜誌) 수준의 황색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에 불과하다. 언론은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이러한 갑질에 어떤 사전 문제제기라도 한 바가 있었던가, 언론은 서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사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았는가, 되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갑질은 외부로 드러나는 것보다 구조화된 권력관계로 나타나는 것이 더 본질적이다. 군사독재시설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강요되어 “백성”들이 체화(體化)하여 관례화된 갑질은 조금 부당한 감이 있더라도 갑질로도 인식되지 않았다. 장발 및 치마길이 단속, 막걸리 보안법, 땡전뉴스(“오늘 전두환, 한편 이순자”의 9시 뉴스 보도)는 물론이고, “까라면 까”정신, 구타, 얼차례, 막발 등은 군대문화로 치부되어 왔지만, 사실은 군대‘문화’(Culture)가 아니라 그자체가 군대갑질과 동의이음어(同意異音語)인 셈이다.

신앙심으로 미화된 종교 갑질은 사회 갈등의 뿌리

한국사회의 가장 낙후하고 천박한 종교분야도 빼 놓을 수 없다. 자신들의 교리를 앞세워 “○○천국, XX지옥”하며 타종교인과 일반시민을 배타시하는 특정“일부”종교인들. 이들은 신자를 그루밍(Grooming; 길들여 지배하기)하여 신앙적, 심리적, 사고능력을 마비시켜 종교적 노예로 전락시킨다. 여기서 갑질은 신앙적 믿음으로 슬며시 전도(顚倒)된다. 종교인들은 신탁(神託)을 대리받은듯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시키고, 선과 악의 대립구도로 신앙적 프레임을 설정한다.

일부 보수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심을 견고히 하기 위해 타자를 악마시하고 그 적대적 배타심에 바탕하여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적 깃발을 휘두른다. 보수종교인들은 사회와 자연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며, 인간 본성은 절대적 이성애(異性愛)라면서 동성애를 악마화한다. 그러나, 동성애는 질병도 아니고, 천한 행위(卑行)도, 잘못된 처사(非行)도 아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성적 기호일뿐이다. 보수종교인들은 동성애를 종교의 이름으로 비난한다. 흑백논리의 도그마(dogma)에 빠져 데마고기(Demagogy; 선동)를 일삼으며, 동성애자를 자신들의 제단에 희생물로 봉헌하는 셈이다. 이는 갑질을 뛰어넘은 교리적 폭력이자 인격적 살인인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류사적 갑질이 신앙심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며 종교의 역사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갑질을 일소시키려는 ‘을’들의 저항과 연대가 절실

그동안 갑질행태가 없었거나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갑질이 사회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서민대중이 촛불탄핵으로 더욱 자긍심을 갖게 되면서 권리의식, 인권의식의 정치적 각성의 발로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갑질에 대한 시민들의 사회적 분노는 평등사회로 가는 마침표이자 이정표로서 구실을 할 수 있다.

한국사회가 아무리 경쟁이 치열하고, 인심이 각박하다 하더라도 이제 갑질이 통용될 수 있는 시절은 아니다. 최근의 공정무역, 공정여행, 공유경제, 착한소비, 사회적경제는 사고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작은 변화의 조짐들이 보인다. 어떤 아파트 익명의 입주자는 택배기사들을 위해 “비가오나 눈이 오나 입주민을 위해 때맞춰 배송하시느라 노고가 크십니다”라며, 생수를 제공한다는 미담도 전해진다.

햄버거 점포 ‘버거데이’에서는 선순환 기부운동 ‘미리내’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미리내 운동은 다른 이를 위하여 상품 값을 대신 미리 지불한다. 노숙인, 노약자,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눈치보지 않고 마음 편하게 햄버거를 먹을 수 있도록 익명의 기부자가 미리 기부를 해 놓는 것이다. 식당·카페·미용실·목욕탕 등 530여개의 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서민대중은 자정능력과 연대의 본능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다. 폐허 속에서도 꽃 한송이가 피어나듯, 우리사회 한켠에는 나눔과 베품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우리 ‘을’들이 연대하여 갑질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서민대중이 주체가 되는 공동체의식이 다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고양이 목에 방울은 누가 달 것이며, 부뚜막의 소금은 언제 집어넣을 것인가? 당신과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