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신라 천 년의 자취)
봄이 오는 소리(신라 천 년의 자취)
  • 이은식 논설위원장
  • 승인 2018.05.0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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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창틈으로 내가 누워 있는 안방까지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고 따사롭다. 온 집안이 봄 내음으로 가득하여 마침내 깊은 호흡을 한다.
적당한 차가움과 따사로운 온기가 섞인 봄날의 부드러움 속에 밖으로 나가고 싶어 가슴 활짝 열고 기지개를 켜며 주위를 둘러본다. 화창한 봄이 어김없이 다가왔다. 산수화·개나리·목련 등 영춘화(迎春化) 꽃망울이 봉긋봉긋 소담스럽게 부풀어 오르고, 나뭇가지 끝마다 뾰족 내민 새순이 포근한 봄기운을 전한다.
 알알이 버들강아지를 맺은 가지가 점점 휘어 늘어지며 연둣빛이 완연하다. 양지 바른 뜨락 밑 돌담 사이로 새 생명을 싹틔우는 풀꽃들의 파란 숨결, 봄이 오는 소리가 완연하니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깊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겨우내 웅크리고 지내며 틀어박힌 일상의 작은 여유 속에서 잠시나마 도심을 벗어나 자연에 묻혀 호연지기에 심취하고픈 마음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불현듯 가슴 설레게 한다.
 오는 봄을 마중하기로 하고 천 년 사적지 고도(古都) 경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라 문화는 신화(神話)가 담긴 그윽한 신비와 조상들의 지혜로운 숨결이 살아 숨쉬는 유적으로 사랑받을 뿐 아니라 세계 10대 유적지의 하나이다.
봄빛은 예상보다 깊이 춘풍세유(春風細柳)답게 흠뻑 물든 실버들 가지들이 싸늘한 소한풍(小寒風)을 반기며 휘휘친친 늘어져 너울거린다. 양지바른 언덕에는 아지랑이 넘실거리고, 연녹색의 새싹들이 앙증맞게 그 여린 순으로 대지를 뚫고 움터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파릇 기지개를 켠다.
 샛강을 이룬 개울과 실개천도 물이 불어 잔잔히 여울진다. 버들강아지 살찌우고 여린 풀뿌리를 적시며 물줄기를 거느리면서 굽이굽이 흘러내린다. 온 산하가 양광(陽光)의 정기에 심취되어 지척에 봄이 오는 소리로 넘친다.
 흐드러지게 필 꽃 소식이 산 넘어 남풍 타고 오는가 보다. 경주에서 불국로를 따라 남행으로 머리를 잡았다. 토함산(土含山) 입구 산자락부터 울창한 노송(老松)들이 그윽한 향을 물씬 내뿜는다.
 나목들 사이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늑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맑은 하늘과 푸른 산의 정취를 느끼면서 시원스런 포장길을 따라 걷는다. 계류를 가로지른 아름다운 화강석 다리를 걷노라니 산 중턱 송림 속에 포근히 안긴 듯 자리 잡고 다소곳이 둘러앉은 거찰(巨刹)이 한 폭의 그림으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천불원력(千佛願力)으로 천년 세월을 자랑스럽게 목청 높이면서 살아온 옛 신라인들에게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높은 이상과 국기(國基)의 요람이었던 불국사(佛國寺)에 당도했다. 신라 문화의 정화와 그 자취가 거룩하고 성스러운 공간이다. 참으로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신라의 석조불에는 신라인들의 은은한 정취와 숨결이 있고, 석공들의 숱한 애환과 정한이 묻어 있다. 그리고 천 년을 서리어 온 한(恨)이 아련히 피어나는 분위기 속에 밀어를 속삭이는 듯 감회에 젖게 한다. 경내에 자리 잡은 청운교·백운교·석가탑과 다보탑의 위용은 신라 문화의 정수로서 찬란했던 한 시대의 지난날을 잘 전해 주고 있다. 흘러간 인고의 풍상을 겹겹이 뒤집어쓴 듯하면서도 천진스러울 정도로 소박한 미의식(美意識)이 그나마 따사롭게 느껴진다고 할까. 이들의 침묵을 지켜보는 나로 하여금 경외스러움과 제행무상(諸行無常)함을 깨닫게 하고 세상사의 흐림에서 잠시나마 있게 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자하문 밖에는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고 안양문 앞에는 연화칠보교가 있다. 이들 다리는 평상 건너다니는 다리가 아니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층층다리이다. 그중 연화교는 극락세계로 올라가는 어귀에 있다. 층층마다 발 딛는 곳에 아름다운 연꽃 무늬를 새겨 밟고 올라가도록 배려하였으니, 매 걸음마다 환희의 이상향을 생각한 신라인들의 깊은 마음이 오죽했으랴 싶다.
 검스럽게 돌꽃 핀 계단과 층계 난간 틈새의 천 년을 두고 거듭 할퀴고 쌓은 비바람과 먼지의 흔적들은 그 자체가 역사요 삶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돌덩이에 평생을 세월 모르는 무서운 불멸의 생명은 오직 예술 하나로 살아오며 인간의 자존과 심혼을 불어넣은 듯 그 작품을 위해 쏟은 석공의 열정과 영혼이 가슴에 와 닿아 세상사 덧없음을 새삼 깨우치게 한다. 그 차가운 돌덩이에 깊은 사랑의 정한과 생명조차 쏟아 넣은 애틋한 사연이 있다는 ‘아사달’의 무영탑(無影塔)은 높은 격조를 나타내려고 욕심냄도 으스댐도 없이 그 정취가 질박하고 포근한 정감에 넘친다. 겉으로는 차갑고 딱딱하지만 그 내면에는 한없이 따뜻한 핏줄이 흐르는 듯싶었다.
 더욱이 여러 석조물에 대한 뛰어난 조형미술의 표현은 우아하고 소박한 간결미와 은근미로 그 아름다움의 극치가 긴 역사 속의 향기로 한결 돋보였다. 또 한편, 거리를 두고 흐르는 선(繕)이 정교하고 수려하고 날렵한 다보탑의 조각 솜씨는 무엇보다도 신비롭고 환상적이었다. 억겁의 세월도 변함없이 계속 이어갈 다짐이나 하듯 무념무상으로 오가는 나그네의 회포를 풀어 주기에 충분하였다.
 불국사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불국정토(佛國淨土) 사상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신라인들의 욕구에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우리 건축의 백미로 이해된다. 임란 때 소실되고 중창된 대웅전이 비록 천 년 풍상으로 예스러운 멋은 부족하나 그 온유하고 너그러움엔 평화가 서려 있다. 그리고 한국 불교의 전통과 깨달음에 대한 열망을 안고 고스란히 가꾸어 가는데 큰 몫을 하는 것 같아 그 운치가 남다르다.
 아직 인적이 드문 산사(山寺)를 거닐면서 나 자신과 삶의 변화를 즐기는 곳곳에 숨은 비경, 훈훈한 정신 공간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겸허해지는 것은 곧 부처님의 자비로움 탓이리라. 천 년 세월의 아득함 때문일까, 여러 갈래로 만나는 서정(抒情)이 감개무량하다.
 불교에서 사즉생(死卽生)이요 생즉사(生卽死)이며, 모든 생명은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윤회한다고 했다. 실제로 현인들은 자신이 언제 죽어 누구로 환생할 것인지를 예지한다고 했으며, 죽음이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믿지 않았던가? 과연 오늘의 삶이 주는 또 다른 경외의 세계에 귀 기울인 하루였다.
피로와 체증, 공포와 온갖 시름의 도시생활에서 찌든 생명을 다시금 추스르는 계기가 되었으며, 마음속 찌꺼기까지도 단숨에 씻어 내리는 듯했다. 그리고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간섭받지도 않는 나만의 시간, 나만의 생각을 통해 순간적으로 나를 되찾고 세상을 멀리 내다볼 수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나들이였다.
 산자락 동구 밖의 댓잎에서 서걱이는 바람소리가 신선한 노랫가락으로 들린다. 문득 봄을 재촉하는 꽃샘추위가 귓불에 와 닿는다. 하지만 대지를 살찌우는 바람인 걸 싫을 까닭이 없다. 땅은 그 꽃샘바람이 내 마음 한구석의 헛된 열기를 식혀 주는 청량제였다.
 고도(古都)에 봄이 오는 소리, 아직은 때 이름을 시샘하듯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바람결이 차갑다. 하지만 봄빛은 정녕 화사하게 우리 곁을 바짝 다가서고 있다.
 

한국인물사연구원 원장

시, 수필, 한국사 작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