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최저임금 인상 논란과 기본소득
사설, 최저임금 인상 논란과 기본소득
  • 연합매일신문
  • 승인 2018.08.1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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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통한 보편적 복지로 기본권․인권 향상시켜야

최저임금 인상은 비취업 저소득 취약계층에게 효과 없어

기본소득을 통한 보편적 복지로 기본권․인권 향상시켜야

 

세상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것이다. 동학교주 최시형은 《천지부모》라는 경전에서 “밥 한 그릇에 세상사가 다 들어있다.”(食一碗萬事知)”고 했다. 최시형의 일갈(一喝)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변치않는 진리이다. 그래서, “호구지책”(糊口之策)이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달리 토(吐)를 달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전쟁과, 민란과, 혁명의 본질은 먹고사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무릇 통치자는 마땅히 국민의 식의주(食衣住)를 살펴야 할 것이요, 통치자에게는 ‘백성의 밥’이 하늘이고 하늘이 백성인 것이다. 민심이 이반(離叛)된 정치는 나라님조차도 끌어내리지 않던가.

 

“평생을 비정규직으로 전전해야 할 것 같은 희망없는 내일”

당초 소득주도 성장을 주창하며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열겠다며 호언장담하던 새정부의 기세에 비하면, 현재의 최저임금 논의는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자영업자들의 경우 최저임금 때문에 시급 알바보다 못한 수익을 버노라는 한탄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곤 한다.

주변을 돌아봐도, 먹고 살기 참 힘들다고들 한다. 실제로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아득하다. 촛불도 들었고, 대통령도 끌어 내렸고, 정권도 바뀌었는데, 정작 서민들이 체감하는 삶은 더 강퍅(剛愎)해졌다.

세상의 생생한 목소리를 조금 들어보자 “할아버지는 폐휴지를 주우며 독거노인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시고, 아버지는 임금피크제에 명예퇴직을 당한 채 다시 비정규직이 되어 계약만료에 떨어야 하고, 엄마는 희망퇴직 강요당하고, 형은 비정규직으로 불안한데…, 나는 살림에 몇 푼 보태겠다고 아르바이트하다보니 강의 따라가기도 벅차고, 학점이 안 되니 장학금도 못 받고, 대출받아 등록금을 내고, 다시 등록금을 벌기위해 또 아르바이트를 나서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졸업 후에는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학점은 낮고 준비도 없이 급한대로 중소기업체에 계약직으로 취직하고, 결국 3포족(연애, 취업, 결혼)에서 칠포족(집, 경력, 꿈, 인간관계)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어느 대학생의 현실인식은 차라리 비극적 체념에 가깝다.

또 한 학생의 비탄을 들어보자. “대학 등록금을 내느라 쪼들리는 살림살이에 부모님 눈치가 보여 몇 푼이라도 보태겠노라고 일주일 강의를 몰아듣고 알바를 뛰지만, 알바에 쫓겨 수업도, 보고서도, 팀플(Team Paly)도 엉망이고, 결국 학점은 권총(F)차고, 장학금은 날라가고, 다시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알바를 나서야 하는, 대학 졸업후에도 이런 사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질런지 확신은 들지 않고, 집안 형편상 대학원 진학은 아예 꿈도 못꾸겠고, 학점이 나빠 대기업 공채도 기대하지 못하고, 결국 평생 비정규직으로 전전하지 않을까 싶은, 도통 내일의 희망은 없는데도 희망을 품으라는 희망고문이 힘겨운 하루”라는 넋두리에는 그저 가슴이 먹먹해 질 뿐이다.

 

최저임금 인상이 원죄인가?

보수언론은 연일 경제가 심상치 않다고 목울대가 터지라고 핏대를 올린다. 보수언론은 최저임금과 자영업자를 대립시켜 ‘을(乙)과 을(乙)’의 대립구도로 갈등을 부추긴다. 그동안 독점재벌 삼성, 현대, SK, 롯데, 한진의 적폐에는 눈을 감았던 보수언론이 이제서야 서민팔이하며 대변자인양 표변하는 모습을 보면, 시속(時俗)의 인심은 참으로 사납다.

2018년 최저임금(최저시급)은 7,530원, 최저월급은  1,573,770원, 주휴수당 포함된 최저시급은 9,036원으로, 2017년 월급여 기준으로 16.4%인상된 금액이다. 그동안,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간의 임금격차가 격심하였고, 청년․여성․노령층 중에 다수가 단기 근로에 종사하고 있어, 그동안의 인상추세를 감안한다면 2018년 최저임금의 인상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다.

통상적으로, 최저임금은 지난 29년간(1989년~2018년) 평균 9.21%인상되었다. 근래 한국경제의 부침이 심하였던 1989년부터 2018년까지의 기간을 3개의 소시기(小時期)로 구분하여 최저임금 인상률 추이를 검토해보자. 1987년(민주화와 789노동자 대투쟁)부터 1997년(경제위기)까지 최저임금 평균인상률은 11.2%를 보여주고 있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의 최저임금 평균인상률은 9.68%이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의 최저임금 평균인상률은 6.07%이다. 2018년 인상률 16.3%를 포함하여 지난 10년간 평균인상률은 기껏 7.1%이다. 이는 3개 소시기 전체기간 평균치(9.21%)에도 못 미치는 인상률이다. 그러니, 재벌과 대기업, 중기업들은 자영업자, 영세업체를 앞장세워 너무 앓는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에도 해당되지 않는 저소득 취약계층이 문제의 핵심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는 분명히 있다. 청와대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면, “최저임금인상의 긍정효과는 90%이며, 월급 받는 근로자의 개인소득을 분석해보면 상위 10~90%는 소득이 증가하였고, 상대적으로 근로소득이 낮은 부분에서 더 많이 증가함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자, 이제부터 반론이다. 최저임금 향상효과는 ‘근로능력이 있는 취업자’를 대상으로 했을 때 분명 효과가 있는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 그러나, 최저임금을 감당하기 어려운 영세사업장에서는 오히려 고용감축이 발생할 수 있다. 또, 근로자 외의 자영업자는 최저임금 인상정책의 대상자가 아니다. 비공식 취업자, 실직자는 통계에 포함되지 않고, 근로능력이 없는 시민은 최저임금 인상의 대상에서도 누락되고 있다. 이는, 최저임금 인상 정책이 ‘일자리를 가진 근로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제한적이며, 선별적이고, 불공평한(?) 정책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최저임금 효과분석은 개인소득을 위주로 파악한 것이고, 생계가 불안한 저소득가구, 고령자가 포함된 저소득층에 대한 분석은 오히려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무엇이 중한디? 중요한 것은 국민의 복리민복(福利民福)

“최저임금은 올랐는데, 정작 저소득층, 취약계층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감소하였다”? 이런 언어도단(言語道斷)적인 상황이라니? 이러한 문제의 핵심은, 취업자 중심의 최저임금 정책이 결국 국민 다수를 포괄할 수 있는 정책이 아님을 입증하였다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 방향은 무엇인가?

결론은 간명하다. 자산 무관, 소득 무관, 가구 무관, 취업 무관, 성별 무관, 연령 무관, 인종 무관, 학력 무관하게,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기본소득, Basic Income)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사회공동체가 “모든 이에게 조건 없이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일정액의 수입”이다. 한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해당 사회공동체 내부의 공유자산으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의 일정 부분에 대하여 당연히 배당 받을 수 있는 권리이자 ‘보편적 복지’라고 할 수 있다. 전체 사회구성원이 인간다운 삶을 향유(享有)할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국가요, 최선의 정부라 할 것이다.

 

기본소득은 선별복지에서 보편적 복지로 가는 이정표

과거 보수정당은 초·중·고등생들의 무상급식을 두고 “이건희의 손자도 공짜 급식들 줘야 하느냐”며 막아서며, 이건희를 핑계대며 다수 학생들의 밥그릇마저도 빼앗으려 한 적이 있었다. 삼성의 이건희 손자 무료급식까지 아껴야 한다며 걱정을 하는 보수정당의 살뜰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결국, 소득에 따라 일부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에게만 무상급식이 시행되었고, 이는 아이들을 소득에 따라 차별하는 낙인(烙印)과 식별(識別)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학교현장에서 벌어지는 “급식충” 손가락질은 밥 한 그릇을 두고 아이들을 편가르고, 아이들 가슴에 피멍을 맺히게 했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시혜도 배려도 아닌 보편적 권리이다. 기본소득은 시민된 자의 천부적 권리이자, 인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새로운 복지정책이나 복지제도’의 도입 혹은 개선이 아니다. 그동안 사회적 부(富)를 공유할 수 없었던 시민들에 대한 권리의 재해석이자, 기본권의 보장이며, 최소한의 인권 보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사회적 패러다임의 전환

사회의 변화․발전에 따라 오늘날 당연시 되는 정책, 제도, 문화 등은 과거 어느 순간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그 시대의 공통된 인식의 틀: Thomas Samuel Kuhn)이 발생한 것이다.

기본소득을 주창한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은 <상식>에서 시민들에 의해 ‘합의된 자율통치의 새로운 사회기준’이 필요함을 역설한 바 있다. 한국의 사례에서만 보더라도, 노비제 타파(갑오개혁, 1894년), 국민학교 의무교육 도입(1954~1959년), 장발과 미니 스커트 단속과 폐지(1970년대), 만65세 이상 지하철 무료승차(1980년), 야간 통행금지 해지(1982년), 중학교 의무교육 도입(1985년), 버스 안내양제 폐지(1990년 완전 폐지), 무상급식 도입(2001년, 과천시 최초), 호주제 폐지(2005년), 간통죄 폐지(2009년),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2013년) 등. 일련의 사안들은 지금은 돌이켜보면 지금은 당연시 하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사회적 논란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일단 시행된 후에는 다시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합의된 자율통치의 새로운 사회기준’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지난날의 과거는 ‘오늘의 일상’이 되기까지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치며 여기까지 왔다. 시계바늘을 되돌릴수는 있을 지언정, 물리적으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현재로서는 다소 돌출적인 사안으로 보일수 있지만, 결코 돌이키기 힘든 경향(傾向)적 추세(趨勢)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자본주의를 보수, 수호, 옹호하는 운동에 불과

이상(理想)으로서는 최선(最善)을 추구하되, 현실(現實)에서는 실현가능한 차선(次善)을 선택해야 한다. 기본소득제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점이 해소되지는 못한다. 기본소득은 저출생/고령화, 고용 불안, 소득격차, 4차산업혁명으로 인한 인간노동의 무가치화, 복지의 사각지대, 고독사, 독거노인, 자살률, 빈익빈부익부의 사회악을 일소할 수는 없지만 다소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 그 자체가 아니라,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위 ‘보수우파’들의 거짓․과장․왜곡 선동이다. 기본소득은 자본주의를 보수하고, 수호하자는 정책이다. 자본가를 몰아내자는 것이 아니다. 계급혁명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기본소득은,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 속에서 해결책을 찾자는 온건하고 보수적인 정책의 하나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송파 3모녀사건, 깔창생리대, 고시원 고독사, 화장실 출산 등의 비극은 점차 감소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기본소득 촉구운동은 시민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권리추구의 과정이다. 이제 그 길에서 다같은 시민들이 스스로 자기몫을 당당히 요구할 때이다.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