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 민족 · 민주 운동의 큰 어르신 백기완 선생 별세

2021-02-15     김경수 기자
백기완

 

백기완 선생이 노나메기 세상을 위한 큰 뜻을 품고 오늘(2월 15일) 새벽 먼 길을 떠났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15일 백기완 선생이 영면에 든 것과 관련, "선생께서 평생 맞섰던 기득권의 벽, 두려움 없이 마주하겠다"고 말했다.

이 지사는 이날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고문으로 앙상해진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쩌렁쩌렁한 기백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늘 정정하게 곁에 계실 것만 같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삶 자체가 대한민국 현대사이셨던 분.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의 선두에서 온갖 모진 고난을 감내하셨던 분. 그러면서도 늘 우리 사회 보통사람들, 낮은 자들의 유쾌한 연대를 꿈꾸셨다"고 회상했다.

이 지사는 "선생께서 작사하신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삿말처럼, 그리고 전 생애로 실천하셨던 것처럼, 앞서서 나가시는 님을 산 자로서 충실히 따르겠다. 선생께서 평생 맞섰던 철옹성같은 기득권의 벽, 두려움 없이 마주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영원한 스승 백기완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애도했다.

심상정 의원은 트위터에서 “심상정이, 비틀거리지 말고 똑바로 가-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뒤집어엎어버리란 말이야!” 백기완 선생님의 호령이 귓전을 때리는 것 같습니다. 통일문제연구소 방문 때마다 해주시던 뜨거운 격려가 담긴 호된 질책도 이제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라고 백기완 선생을 추모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오전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화운동가 겸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오늘 새벽 우리 곁을 떠났다”며 “치열했던 삶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기억될 것이다.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강은미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이날 낸 메시지에서 “한 평생 농민·빈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해 왔던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이 오늘 새벽 투병 끝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며 “우리 시대 큰 어른으로 눈물과 아픔의 현장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내던지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생께서 못 다 이룬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더욱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통일에 대한 애끓는 열정을 토로하셨던 선생님, 저에게 ‘시원시원하고 단호해서 좋다’고 하셨던 선생님.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라는 애도 글을 남겼다.

민주당 최고위원인 노웅래 의원도 SNS를 통해 “한국 진보운동의 큰 어르신인 백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울컥한다”며 “선생께서는 불의와 독재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한 투사였다”고 밝혔다. 민주당 최고위원을 맡은 양향자 의원도 SNS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선생의 뜨거운 맹세를 잊지 않겠다”고 적었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SNS에서 “오늘 이 시대 청년들에게 장벽이 되고 있는 많은 기득권들과 맞서 제 몫의 용기를 내고 두려움을 떨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으로 선생님의 뜻을 기리겠다”고 말했다.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는 “한평생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의 길을 틔어주신 그 자리에 저희들이 잘 걸어가겠다”고 SNS에 적었다.

1980년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 민주당 의원은 SNS를 통해 “백 선생님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를 여시려다가 감옥에 갇히시기도 했다”며 “삼가 조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김두관 민주당 의원은 SNS 글에서 “항상 민중의 편에서 포효했던 그분의 목소리가 선하다”며 “당신의 민중에 대한 애정을 가슴 깊이 새기겠다”고 밝혔다.

 

앞서 이날 오전 서울대병원에서 민족의 큰 어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89)이 투병 끝에 별세했다.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백 선생은 13살 때 남쪽으로 내려와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며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뜬다. 이후 그는 농민 운동, 빈민 운동, 노동 운동, 통일 운동,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고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부조리에 저항했다. 1974년 2월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1호 첫 위반자로 옥고를 치렀다.

1979년 11월24일 서울 중구 명동 YWCA 강당에서 열린 위장결혼식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다시 옥고를 치른 백 선생은 이때 후일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로 쓰이게 되는 장편시 묏비나리를 썼다.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소설가 황석영이 묏비나리의 구절을 일부 빌어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썼다.

백 선생은 70년대, 80년대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대항한 반독재 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1987년 대선에서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고 양 김(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며 사퇴했다. 1992년 대선에서 다시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백 선생은 최근까지도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백 선생은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백기완의 통일이야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두 어른>, 시집 <젊은 날>, <이제 때는 왔다>, <백두산 천지>, <아, 나에게도> 등의 작품을 남겼다. 최근에는 2019년 <버선발 이야기>를 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미담·현담씨와 아들 일씨(울산과학대 교수)가 있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이고, 장지는 모란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