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대중과 미국: 미국에 대한 인식 및 미국 지도자들과의 만남
[칼럼] 김대중과 미국: 미국에 대한 인식 및 미국 지도자들과의 만남
  • 연합매일신문
  • 승인 2022.08.2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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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난 김대중 대통령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그럼에도 주로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한미관계를 공부하느라 그 위인에 관해 이미 두 편의 글을 썼다. 첫째, 2020년 11월 김대중평화센터와 5.18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 등이 서울 김대중도서관에서 공동주최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40주년 학술회의>에서 “5.18민주화운동 전후 한국정치와 미국의 개입: 박정희 암살, 전두환 쿠데타, 광주 학살, 김대중 구명과 미국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다. 둘째, 2021년 6월 김대중추모사업회가 화순 김대중기념공간에서 주관한 <2021 김대중 민주평화 학술회의>에서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본 민주주의자 김대중과 1971년 대통령선거”에 관해 발표했다. 이제 세 번째로 2022년 8월 김대중평화센터와 김대중추모사업회가 목포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에서 공동주최하는 <김대중과 만델라, 세계 지도자의 평화사상> 학술회의에서 이 글을 발표한다. 영광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럽다.

 

내게 주어진 주제는 “김대중과 클린턴의 만남”인데, 내 맘대로 “김대중과 미국 지도자들의 만남”으로 확대한다. 글의 분량도 크게 늘린다. 국제정치 전문가 겸 ‘외교의 달인’을 통해 남한-북한-미국의 관계를 좀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어서다.

 

 

1. 자료에 관해

 

이 글을 쓰는 데는 내가 흔히 사용해온 미국 외교문서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 김대중의 정치가 비밀활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미국 지도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공개적으로 만났기에 김대중 자서전과 평전들을 주 자료로 삼고, 비밀 해제된 미국 외교문서들은 보조 자료로 사용한다. 모든 참고자료를 아래 소개한다.

 

김대중은 두 권짜리 ≪김대중 자서전≫을 남겼다 (삼인, 2010). 1924년 출생부터 2009년 서거까지의 자세하고 방대한 기록이다. 이 자서전을 주 자료로 이 글을 쓴다. 부인 이희호도 2년 앞서 자서전을 냈다 (≪이희호 자서전: 동행≫, 웅진, 2008).

 

김대중도서관은 ≪김대중 전집≫ 1세트 10권을 2015년 펴내고, ≪김대중 전집≫ 2세트 20권을 2019년 펴냈다. 나는 전집 30권을 전혀 읽지 못했다. 아래 소개하는 장신기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의 김대중 평전을 통해 재인용한다.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김대중 자서전을 집필한 뒤 평전도 썼다 (≪새벽: 김대중 평전≫, 사계절, 2012). 자서전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장신기 연구원은 김대중의 구술 인터뷰 작업 및 김대중 관련 각종 자료집 출간에 참여하는 등 오랫동안 김대중 연구에 매진해왔는데, 김대중의 정치와 정책에 대한 종합평가서 성격의 평전을 펴냈다 (≪김대중 재평가: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 시대의창, 2021).

 

김한정 국회의원은 1989년부터 김대중 총재 비서로 지내다, 1999년부터 김대중 청와대 부속실장을 지내고, 2003년부터는 전직 대통령 비서관을 지냈는데, 김대중의 해외여행을 수행한 기록을 포함한 책을 썼다 (≪나의 멘토 김대중≫, 학고재, 2011). 정진백 행동하는양심 대표 겸 김대중대통령 광주전남추모사업회 상임대표는 김대중을 따르고 추모하는 데 반생을 바쳐오며, 김대중과 미국 지도자들의 대화를 포함한 대화록을 엮어냈다 (≪김대중 대화록 1973-2008≫, 행동하는양심, 2018).

 

미국 국무부가 1960-70년대 한국 관련 외교문서를 비밀 해제해 2010년 출판한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9-1976, Volume XIX, Part 1 Korea, 1969-1972와 1993년부터 부분적으로 비밀 해제하기 시작한 1970-80년대 한국 관련 외교문서들엔 김대중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다.

 

위와 같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쓴 이 글에 김대중과 미국 지도자들의 만남에 관해 처음 알려지거나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다. 주제에 관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기록을 모아 정리할 뿐이다.

 

 

2. 국제정치 전문가 김대중의 미국에 대한 인식

 

나는 이전 글에서 “김대중은 경제 및 안보.통일 분야에서 전공학자 못지않거나 전문가를 능가하는 이론가”라고 썼다. 이 글에선 그가 새내기 정치인 때부터 국제정치 전문가로 시작해 ‘외교의 달인’이 되었다는 점을 밝힌다. 1992년 러시아 외교대학에 정식 논문을 제출하고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진짜 학자가 되기도 했다. 논문이 필요 없는 명예박사 학위는 국내외에서 20개 안팎 받았다.

 

김대중은 한국전쟁 중 1950년 북한군에 체포돼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 탈출했다. 1952년 이승만의 독재정권 연장 시도에 따른 부산 정치파동에 큰 충격을 받고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반북반공 및 반독재 정신으로 정치를 준비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일본 시사잡지를 구해 읽으며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김대중이 1950년대 중반 정계에 입문해 정치 스승으로 삼은 두 사람이 미국통 외교전문가였다. 첫째, 장면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정부수립 직후 제1대 미국주재 대사와 국무총리를 거쳐 부통령을 지냈는데, 1956년 김대중이 천주교 영세를 받을 때 대부가 됐고, 민주당에 입당해 1960년부터 대변인으로 활동하도록 이끌었다. 참고로, 미국 국무부는 4월혁명 직후 한국 새 정부를 이끌 지도자로 친미적 장면을 점찍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세우면 “그의 성실성과 국제정세에 관한 넓은 안목”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정일형은 미국에서 사회학, 철학, 법학을 공부하고 1960년 장면 정부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냈는데, 1967년 신민당이 들어서자 부총재가 되어 대변인 김대중과 함께 활동했다. 1970년 김대중이 대통령후보가 되자 선거사무장을 맡아 그의 미국 방문을 주선했으며 미국 내 인맥을 총동원해 그의 방미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아내 이희호도 국회의원 김대중의 미국 공부에 도움 주었다. 1960년대부터 남편을 돕는 일이 “신문을 샅샅이 읽어 정책 제안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를 스크랩하는 일”이었는데, 영자신문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국제 정세를 보는 미국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대중이 정치 초년생 시절부터 달변의 국제정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더 큰 요인은 ‘10분 대정부 질문을 위해 10시간 준비’하는 등 노력과 자질이 곁들여진 풍부한 독서량에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김대중의 미국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1960-80년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사례 5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1961년 2월 한미경제협정이 체결됐을 때다. 혁신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 및 대학생들은 그 협정이 한국의 대미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하며 미국이 한국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이라고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그 협정의 즉각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했다. “양키 고우 홈!” 구호와 함께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최초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이 전개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 연설회가 열렸다. 이 협정을 통해 한국을 미국에 팔아먹었다는 야당과 무소속 그룹 대변인들에 맞서 여당 민주당 대변인 김대중이 나섰다.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협정이 매국 행위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회의원도 아닌 그의 설득력 있는 연설은 결국 청중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장면 총리는 크게 칭찬했고, 혁신정당은 반대시위를 철회했다.

 

김대중은 자신의 정치철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명언을 1967년쯤부터 써왔다고 한다. 이를 사업가 출신의 초보 정치인 시절부터 익혀온 것이다. 다음 사례에서는 이러한 정치철학을 더 확실하게 맛볼 수 있다.

 

둘째, 1964년 3월 한일협정 체결을 앞두고 있을 때다. 미국은 1949년부터 한일협정을 중재하면서 이승만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혀 주춤하다, 1961년 친일파 박정희가 집권하자 1962년부터 “미국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한국과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하던 터였다. 윤보선 야당 총재가 앞장서 한일협정에 결사반대하고, 야당과 각계 대표 200여명이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2년차 야당 국회의원 김대중은 ‘한일회담 무조건 반대’에 동의하지 않았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미루면 세계의 흐름을 놓치고, 한국만 고립되리라 우려했다. 더구나 미국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북한, 중국, 소련에 둘러싸인 한국이 일본까지 잠재적 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무턱대고 반대할 게 아니라 당연히 추진하되, 무엇을 얻을 것인가 고민하며 협상에서 불이익이 없도록 유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박정희 정권이 형편없는 내용의 협약에 서명하고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시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온다며 감정만을 앞세워 국익을 팽개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대안을 마련해 ‘조건부 반대’를 줄기차게 주장한 것이다.

 

윤보선과 야당 강경파는 “한일 국교정상화는 매국이며, 매국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윤보선은 수십만 학생들 시위의 선두에 서겠다고도 했다. 김대중은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정부는 틀림없이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며 말렸다. 당내에 “김대중은 여당 첩자다. 사쿠라다. 사쿠라 중에서도 왕사쿠라다”는 소문이 퍼졌다. 고향의 아버지가 “앞길이 바다처럼 양양해야 할 아들이 사쿠라로 불리고 있으니 도대체 어인 일인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일을 어째서 하고 다니는가” 하며 탄식과 걱정의 편지를 보냈다. 서울로 올라와 꾸짖기까지 하셨다. 아내는 남편이 여당 앞잡이가 됐다는 야유 섞인 항변을 들었다. 두 아이들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울며 돌아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김대중의 예언대로, 박정희는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시위를 금지하며, 언론을 사전검열하고, 대학문을 닫아버렸다. 영장 없이 압수, 수색, 체포, 구금을 일삼으며 학생, 정치인, 언론인 1,000명 이상을 검거했다. 그리고 “형편없는 내용의 협약에 서명하고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시킨 뒤, 그토록 원하던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셋째,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원 30여명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1.21 사태’와 원산항 앞바다에서 미국해군장병 80여명이 탄 정보함정 푸에블로호 (USS Pueblo)가 북한 초계정에 나포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북한이 늦어도 1966년 말부터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남한의 남베트남 파병을 막으려고 비무장지대에서 다양한 ‘도발’을 늘려온 터였다. ‘1.21 사태’와 관련해, 박정희는 자신을 살해하려던 북한에 대해 보복하길 원했지만, 미국은 어떠한 보복 조치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미국은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USS Enterprise)호와 두 척의 구축함을 동해로 파견하는 한편 폭격기 수십 대를 미국과 일본에서 남한으로 옮겼다.

 

김대중이 1968년 2월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푸에블로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우리가 가장 믿고 의지하고 혈맹의 전우로서 같이 걸어온 미국의 처사를 볼 때..... 미국은 미국, 우리는 우리, 결국은 남과 남의 나라,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내 힘으로 국방을 하지 못하고, 내 힘으로 국토를 통일하지 못하고, 내 힘으로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내 힘으로 경제를 이끌어나가지 못한 약소민족의 비애, 믿고 또 믿은 우방국가라 하더라도 결국 이해가 상치될 때는 자기나라 이익이 제1차로 취급되고, 약소민족이라는 것은 거기에서 뼈저린 설움과 좌절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이번 사건에서 미국의 태도에서 얻은 우리들의 충격은 창자 깊숙이 스며드는 비애요 고독감이라고.....“

 

넷째, 1969년 7월 괌에서 닉슨 (Richard Nixon) 미국대통령이 베트남전쟁 패배 및 미군 철수와 관련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힘으로 하라'는 내용의 새로운 외교정책을 발표했다. 이른바 ‘괌 독트린 (Guam Doctrine)’ 또는 ‘닉슨 독트린 (Nixon Doctrine)’이다.

 

김대중은 1970년 3월 닉슨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외교정책의 문제점 2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탈미국 정책을 급격하게 추진하면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세력을 고무시킬 우려가 있다. 둘째, 일본이 아시아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엔 문제가 많다.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재무장을 우려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970년 7월엔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제 한미 간에 새로운 시대가 왔고.....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이라고 하면 덮어놓고 온정적이고 감상적으로 대해왔습니다. 내 친형제 같이 대해왔습니다..... 외교에는,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내 편도 없습니다..... 미국은 우리를 해방시켜주었고 공산주의자로부터 지켜주었고 지금 여기에 주둔하고 있는 동맹국가이지만.....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가지고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병합하도록 양해해주고, 자기들은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양해받았던 것입니다. 미국은 자기의 국가이익에 따라서는 우리 한국과 언제든지 다시 멀어질 수 있는 나라라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두 달 뒤 1970년 9월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뽑혀 ‘4대국 안전보장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국, 소련, 일본, 중공 등 한반도 주변 4대강국이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제를 공동으로 보장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내가 요즘 국제정치나 한반도 주변정세와 관련해 글이나 강연을 통해 즐겨 쓰는 대목이 있다. “국제관계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은 친구가 되는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것은 국가이익밖에 없다. 어느 나라에게든 외교의 제1목표는 국익이다”는 내용이다. 김대중이 반세기 전 주장했던 말이다.

 

다섯째,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전개됐다. 전두환 군부가 김대중을 핑계로 학살을 저지르고 김대중에 대한 사형까지 저지르려 했다.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관련해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1980년대 내내 급속적이고 지속적으로 폭넓고 강렬하게 전개됐다.

 

반미운동과 관련해 김대중은 1987년 9월 ≪월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친미할 필요도 없고, 반미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국가 이익대로 상대하면 됩니다. 이익에 맞으면 협력하고, 안 맞으면 비판하면 됩니다. 미국에 대해 사촌같이 매달리는 것도 사대주의이지만, 잘 안 해준다고 토라져서 마구 화내는 것도 역사대주의입니다.” 숭미와 반미를 비판하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대미 외교를 강조한 것이다.

 

나는 1980-90년대 미국에서 반미주의를 주제로 석사와 박사논문을 쓰고 다음과 같이 주장해왔다. “우리는 먼저 미국을 바로 알고, 경우에 따라 미국을 편들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반대도 하면서, 궁극적으로 미국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지미를 조건으로, 친미하든 반미하든, 용미를 목표로 삼자는 말이다. 김대중이 1987년 했던 말을 조금 고친 셈이다.

 

 

3. 외교의 달인 김대중과 미국 지도자들의 만남

 

김대중은 1966년 2월 난생 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민중당 대변인으로 국무부 초청을 받아 동료의원 2명과 함께였다. 포드 (Gerald Ford)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와 잠시 환담했다. 그는 1973년 애그뉴 (Spiro Agnew) 부통령이 뇌물사건으로 사임하자 부통령에 지명됐고, 1974년 닉슨 대통령이 워터케이트 사건으로 탄핵 직전 물러나자 대통령에 취임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김대중이 1971년 1월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방미해서는 국무부관리, 의회 지도자, 저명 교수 등 다양한 인사들을 두루 만났다. 1972-73년 유신독재에 따라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망명생활을 하고, 1973년 일본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에 납치돼 수장될 뻔하다 극적으로 생환하는 과정에서 국제적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1970년대 내내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인권투쟁으로 오랫동안 감옥에도 갇히고 집에서도 연금 당하면서 미국 지도자들의 관심과 우려를 끌었다.

 

1980년 5월 광주학살과 함께 전두환 군부에 체포, 구금, 투옥돼 사형선고를 받자 그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지명도가 더 높아지고 세계적 구명운동이 전개됐다. 카터 (Jimmy Carter) 대통령과 레이건 (Ronald Reagan) 대통령 등 미국 최고지도자들까지 적극적으로 김대중 살리기에 나섰다. 1982년 12월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1985년 2월까지 미국에서 2차 망명생활을 하며 각계 지도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의 만남까지 일일이 언급할 필요 없이, 대표적으로 네 사람만 소개한다.

 

 

1) 김대중과 케네디 형제: 대통령과 상원의원

 

김대중이 정치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만난 미국 지도자는 존 케네디 (John Kennedy) 대통령이었다. 언론과 책을 통해 만난 우상이다. 그는 김대중보다 7년 앞선 1917년생으로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43세 최연소 대통령 당선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그는 지금까지 미국의 정치경제를 이끌어온 ‘와습 (WASP)’이라 불리는 ‘영국계 백인 개신교도 (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아니라 영국으로부터 핍박 받아온 아일랜드 출신 천주교도다.

 

1961년 1월 취임한 케네디가 1963년 11월 암살됐다. ‘한국의 케네디’가 되고 싶었던 김대중은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유세 중 비보를 접하고 크게 충격 받으며 슬피 울었다. 훗날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대통령 후보로서 닉슨과 벌인 텔레비전 토론은 선거문화를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또한 쿠바 미사일 위기를 맞아 소련 총리 흐루시초프와 세기의 힘겨루기를 했다. 일촉즉발의 대치에도 그는 유연하면서도 단호했다..... 케네디는 참다운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나에게 힘과 용기가 되었다. 나도 젊음을 바쳐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길을 제시하고 싶었다. 썩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앞에서 소개했듯, 김대중이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반대하면서 당내에서 ‘여당 앞잡이’, ‘첩자’, ‘사쿠라’ 등으로 비난당할 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신념을 지키려는 어려움, 그 신념을 이해해주지 않는 괴로움이 온몸을 찔렀다”고 했다. 그 때 그의 우상이 다음과 같이 응원했다. “그때 마침 케네데 대통령이 쓴 ≪용기있는 사람들 (Profiles in Courage)≫을 읽었다. 미국의 많은 정치가들이 동지와 국민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파멸 직전에 이르지만 국가를 위해 최후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케네디는 저세상에서도 나에게 이렇듯 좋은 선물을 주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주먹을 쥐어 보고 또 스스로를 달랬다.”

 

김대중이 ‘한국의 케네디’가 되고 싶어 하는 사실은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그가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자, 미국 국가안보회의 (NSC) 참모가 한국 대선 관련 정보를 요약해 키신저 (Henry Kissinger) 대통령보좌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김대중은 매력적이고 활동적인 45세 정치인으로 천주교 신자이며 영어를 못 한다..... 그는 ‘한국의 케네디’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개방된 선거유세에 호의적 반응이 확산되지만, 당선 가능성은 현재 미미하다.”

 

김대중 대통령후보가 1971년 1월 미국을 방문했다. 선거 3개월 앞둔 때라 박정희 정권이 극도로 경계하며 방해했지만, 김대중은 다양한 사람들을 두루 만났다. 로저스 (William Rogers) 국무부장관을 비롯한 국무부관리들, 풀브라이트 (James Fulbright) 상원외교위원장과 케네디 (Edward Kennedy) 상원의원을 포함한 의회지도자들, 코헨 (Jerome Cohen) 하버드대학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이었다. 닉슨 대통령도 만나고 싶었지만 주미한국대사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닉슨이 주최하는 조찬기도회엔 참석했다. 대신 아내 이희호가 백악관을 방문해 닉슨 부인을 만났다. 풀브라이트는 김대중이 의회를 방문하자 주재하던 회의를 중단하고 40분간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이 가운데 존 케네디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와의 만남이 가장 뜻깊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된 형의 상원의원 자리를 이어 1962년부터 2009년 죽을 때까지 상원에서 영향력이 매우 큰 인물이었다. 형을 우상으로 삼았던 김대중을 자상하고 따뜻하게 격려했다. ”당신은 ‘한국의 케네디’로 불리고 있던데, 우리 케네디 집안은 지금까지 선거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도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한국에서 언제든 전화를 주십시오.“

 

1972년 10월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시작되자 김대중은 망명을 결심하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반대 활동을 펼쳤다. 주일대사를 지낸 라이샤워 (Edwin Reischauer) 하버드대학 교수를 자주 만나며 그의 소개로 의회 지도자들을 만났다. 다시 만난 케네디는 여전히 김대중을 신뢰하며 망명 중 문제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다.

 

케네디는 1980년 전두환의 5.17쿠데타로 김대중이 체포되자 6월 초 국무부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 당국의 적극적 대응을 요구했다. “계엄포고령 해제 및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치지도자들을 포함해 임의로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 석방을 촉구하며, 이들 정치지도자들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한미관계가 급격히 악화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1981년 9월 김대중이 군사재판 1심에 이어 11월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선고 받자, 세계 각국에서 이에 대한 비판과 항의가 쏟아졌다. 당연히 케네디도 김대중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한을 한국정부에 보냈다.

 

1982년 1월 대법원이 김대중 사형을 확정했지만, 레이건 (Ronald Reagan) 대통령의 초청 선물을 받기로 한 전두환이 김대중의 형량을 무기형으로 바꾸고, 3월 20년형으로 줄였다. 12월 김대중이 형집행 정지와 함께 미국으로 2차 망명길에 오르자, 케네디는 수석보좌관을 공항으로 보내 마중했다. 그리고 1983년 2월 상원의사당 안에서 전.현직 고위 관리들과 의원들을 초청해 김대중 망명 환영행사를 크게 베풀었다.

 

그 후 김대중이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케네디를 꼭 만나는 등 둘의 우정과 협력은 1971년부터 평생 지속됐다.

 

 

2) 김대중과 카터 대통령

 

김대중과 동갑인 카터는 유난히 도덕정치와 인권 그리고 평화를 중시한 대통령이었다. 1970년 미국에서 흑인차별이 가장 심하고 보수적 지역으로 꼽히는 조지아에서 주지사로 당선돼 "인종차별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 사람이다. 1977-81년 대통령으로 일할 때는 무능하다고 인기가 낮아 재선에 실패했지만, 퇴임 후 정력적 평화운동가로 나서 더 유명해졌다.

 

카터가 박정희와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1979년 6월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인권문제와 주한미군 철수를 1976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1977년 취임하자마자 한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해 박정희와 극심한 갈등을 불러오고 있던 터였다.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 인사들과 학생들은 카터의 인권정책 때문에 그에게 우호적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방한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글라이스틴 (William Gleysteen) 주한미국대사는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김대중과 윤보선 등 한국 반체제 인사들과 주한미국인 지지자들, 그리고 이들에 동조하는 한국 방문 미국인들이 정상회담 개최를 방해하거나, 최소한 연기시키기 위해 중대한 압박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이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이유는 회담을 통해 미국이 박정희 개인을 승인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인권 증진에 역행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정상회담을 반대하게 되면 그나마 제한적으로 증진되고 있는 인권을 오히려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카터가 몹시 굳은 표정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인권 대통령’으로서 ‘한국의 가장 저명한 인권 희생자’로 가택연금에 처해있던 김대중과 오래 전부터 면담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카터는 미국을 떠나기 전 “한국대통령과의 일정을 취소하게 되더라도 김대중을 만나야겠다”고 했다. 이에 글라이스틴은 그러면 “정상회담 분위기가 냉각되고, 한국방문 성과가 사라지며, 박정희가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여 인권문제에 관한 미국의 노력이 무산될 수 있다”며 극구 만류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회담이 역사상 가장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가운데 신랄하고 험악한 말이 오갔다. 카터는 인권이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면서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재소자들을 될수록 많이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김대중은 2010년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에 온 카터 대통령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박 정권은 나와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때는 만나지 못했지만 카터와 나는 훗날 교분을 쌓고 한반도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김대중은 카터와의 만남을 박 정권보다 주한미국대사가 더 적극적으로 방해했던 사실을 그 후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 정부도 잘못된 공식 성명을 1989년 6월 발표했다. 1988년 한국 국회에 설치된 ‘5.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위원회’가 사건 당시 미국 측 핵심 당사자들이었던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의 증언을 요청하자, 국무부가 이를 거부하는 대신 서면 질문에는 회답한 것이다.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사건들에 대한 미국정부 성명 (United States Government Statement on the Events in Kwangju, Republic of Korea, in May 1980)>이란 제목으로 약 50쪽의 문서를 통해 미국의 개입과 역할을 어느 정도 밝혔는데, 그 정부문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카터 대통령은 1년 전 김대중 씨를 만난 일이 있어 그의 사정에 대해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 밝히듯, 카터와 김대중은 1980년 서울이 아니라 1983년 조지아에서 처음 만났다.

 

1980년 8월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카터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대중 관련 대목만 소개한다. “김대중 씨에 대한 재판은 국제적으로 널리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이 이 사안이 불공정하게 처리됨으로써 한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저해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촉구합니다. 김대중 씨를 처형하거나 단순히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1980년 9월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자 아내 이희호가 카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목숨을 구해달라는 간절한 청원이었다.”

 

1980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레이건 공화당후보가 카터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감옥에서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당시 심정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항소심 선고공판은 11월 3일 육군 대법정에서 열렸다. 재판부는 1심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이틀 후인 5일, 사형선고보다 더 낙담할 일이 일어났다.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이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도덕성과 인권을 강조했던 카터 대통령이 재선했더라면 내 신변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희망이 고여 있던 마지막 둑이 터져버렸다. 나는 너무 슬펐다. 발을 뻗고 소리 내어 울었다. 레이건은 보수파로 더 이상 기대를 걸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정녕 사형이란 말인가.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말인가’.”

 

카터는 12월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김대중 사면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두환에게 보냈다. 일주일 후 도쿄를 거쳐 서울을 방문한 브라운 (Harold Brown) 국방부장관은 전두환을 만나 김대중을 처형하면 한미 간 안보와 경제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카터의 ‘엄중한 메시지’를 전했다.

 

1981년 1월 카터는 레이건 당선자에게 김대중 구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대통령직 인계인수에 ‘김대중을 살려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레이건이 전두환에게 김대중의 생명을 보장하도록 요구했다는 것을 알고 카터는 이에 고마움을 표했다.

 

1983년 3월 김대중과 카터가 드디어 만났다. 김대중이 1982년 12월 형집행 정지를 받고 미국에 망명해 있으면서 조지아 에모리대학에서 강연하고, 1993-97년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레이니 (James Laney) 총장과 카터 센터를 방문한 것이다. 김대중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사형수로 있는 나를 구명하려 노심초사해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당신이 선거에서 레이건에게 졌을 때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발을 뻗고 울었습니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김대중에게 카터가 화답했다. “독재자들이 그렇게 협박하고 회유해도 굴하지 않는 당신의 용기와 인내심을 높이 평가합니다. 앞으로도 긴밀히 연락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동지입니다.” 2년 후, 1985년 1월 김대중이 2월 실시될 한국 총선에서 야당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귀국을 결심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별강연을 하자 카터가 축하 전문을 보냈다.

 

김대중이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또 떨어져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1-7월 영국에 머무르다 9월 미국을 방문했다. 구상 중인 아태평화재단에 대한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카터와 키신저 등을 만나 통일구상을 설명하고 협력 당부해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특히 카터는 김대중의 의견을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과 국무부장관에게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10월 스칼라피노 (Robert Scalapino) 버클리대학 교수와 대담하면서는 카터 대통령을 미국의 대북 특사로 보내 김일성과 북핵문제에 관해 일괄타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1994년 미국이 북한 핵시설 폭격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5월 김대중이 워싱턴을 방문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북핵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그해 그 클럽의 ‘베스트 스피치’로 뽑힌 연설에서 “국제적으로 존경받고 특히 중국과 북한에서 신뢰를 받으며 클린턴 대통령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원로 정치인을 북한에 보낼 것을 권하고 싶다”며, ”가장 적합한 인물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라고 했다. 물론 김대중은 하루 전 카터에게 전화해 설득하고 동의를 얻었다. 카터는 만약 북한에 가게 되면 사전에 김대중의 조언이 필요하다며 꼭 만나보겠다고 했다.

 

6월 카터가 방북 길에 서울에 들러 김대중을 만나고 싶어 했다. 김영삼 정권이 그의 방북 자체를 비판하고 반대했기에, 카터는 김대중을 직접 방문하는 대신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를 보내 조언을 구했다. 카터가 평양에서 김일성과 만나 북미전쟁으로 치달을 뻔한 갈등위기를 해결하고 김영삼-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합의 선물까지 안고 돌아왔다.

 

7월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자, 이른바 ‘조문 파동’으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다. 이를 풀기 위해 김대중이 9월 미국을 방문해 카터를 다시 만났다. 카터는 자신의 방북과 북미 갈등 해소에 대한 김대중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감사했다. 김대중이 한반도 평화에 대한 카터의 노력에 사의를 표하며 재방북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김대중이 19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고, 6월 클린턴과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에 망명했던 사형수가 대통령이 돼 방문한 터라 정상회담 말고도 15회 연설과 70회 이상의 행사가 예정된 상황에서 숨가쁜 시간을 보내느라 밀려드는 면담 요청을 다 들어줄 수 없었다. 특히 카터가 만나자고 했지만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은 김대중이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 대신 2001년 8월 카터가 ‘사랑의 집짓기 (Habitat movement)’ 운동 자원봉사자로 한국을 방문하자, 김대중은 충남 아산으로 달려가 땀흘리는 ‘평화와 인권의 전도사’를 만났다. 카터가 다음해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대중이 2년 전 먼저 그 상을 받느라 조금 미안했는데 그에게 맘껏 축하인사를 보냈다.

 

둘의 우정을 옆에서 지켜본 이희호는 2008년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카터 대통령 부인) 로절린 카터는 여러 차례 만나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카터는 남편의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현직 미국대통령으로 힘을 보태준 생명의 은인이다. 퇴임 후에도 민주주의, 인권, 평화의 가치관을 공유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들로 지금까지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3) 김대중과 클린턴 대통령

 

김대중은 22년 아래 아들뻘 클린턴을 1998년 대통령으로서 만나기 시작해 짧은 기간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김대중이 1992년 클린턴을 스치듯 만난 적은 있다. 5월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으로 피해 입은 한인동포들을 위문하기 위해 의회조사단과 한인촌을 둘러본 뒤 로스앤젤레스 시장을 만나 적극적 대책을 촉구했다. 그리고 1992년 대통령선거 운동차 시청을 방문한 클린턴 후보를 우연히 만나 한인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클린턴이 축하 전화를 했다. “민주주의와 정치 진보를 위해 일생을 헌신한 김 당선자가 위대한 승리를 한 데 축하와 존경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국제통화기금 (IMF)과의 합의를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김대중이 김영삼 정부의 외환위기를 떠안았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아무리 한국 상황이 급박하더라도 클린턴이 당선자와의 첫 통화에서부터 그런 말을 하는 게 지나치고 무례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1998년 6월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에서 만난 클린턴은 크게 달라졌다. 그의 백악관 환영사는 의례적 덕담이 아닌 최대의 찬사였다. “오랫동안 정부로부터 부당하고 가혹한 탄압을 받다가 결국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인권의 개척자이고, 용기있는 생존자이며, 세계를 위해 더 좋은 미래를 건설하려는 미국의 동반자입니다.” 정상회담에서 대북정책을 소개해달라는 클린턴의 요구에 김대중이 햇볕정책의 배경과 내용을 설명했다. 30분간 경청한 클린턴이 말했다. “김 대통령의 비중과 경륜을 볼 때 이제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이 주도해주기 바랍니다. 김 대통령이 운전대 잡아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정상회담 공동 발표문에 “미국의 포용정책과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따라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확대하되, 그 과정에서 양국이 서로 소외되지 않도록 긴밀한 공조를 유지한다”는 표현이 들어갔다. 클린턴은 의회가 이를 수용할 수 있도록 의회를 직접 설득해달라고 요청을 덧붙였다. 나아가 중국 방문을 앞둔 자신에게 자문을 구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김대중-클린턴의 찰떡궁합과 함께 사상 처음으로 남한이 대북정책을 주도하고 미국이 추종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1998년 11월 김대중-클린턴 2차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북한의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과 대포동 미사일 발사 등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좋지 않을 때였다. 그럼에도 클린턴은 김대중의 대북정책을 강력히 지지한다며 “대북정책은 한미 공조 아래 일관성 있게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고 했다. 전날 숙소에서 금강산 관광선이 출항하는 것을 지켜봤다며, “감동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는 말을 덧붙였다.

 

1999년 7월 클린턴이 김대중을 초청해 3차 정상회담을 열었다. 실무 방문인데도 영빈관을 숙소로 내줬다. 한국의 빠른 IMF 졸업과 경제회복에 대해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축하하며 김 대통령의 지도력에 경의를 표합니다”고 했다. 수시로 김대중의 손을 잡고 친근감을 표하며 김대중의 필라델피아 ‘자유 메달’ 수상에 대한 축하와 덕담도 건넸다.

 

1999년 9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의가 뉴질랜드에서 열렸다. 그 무렵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인도네시아 군부와 민병대가 유혈 탄압하며, 동티모르 전역에서 학살과 방화로 인구 1/3이 희생당했다. APEC 정상회의 주제가 아니었지만, 김대중이 영향력 큰 미국, 중국, 의장국 뉴질랜드 등의 정상들을 포함해 만나는 모든 정상들에게 동티모르를 돕자고 호소했다. APEC 분위기를 전달 받은 인도네시아 군부가 탄압 중단 명령을 내렸다. 199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이끌던 라모스 오르타 (Jose Ramos Horta)가 나중에 청와대를 방문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APEC 정상회담 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동티모르 사태와 관련해 보여준 지도력에 감사드린다고 했더니,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의 김 대통령에게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김 대통령의 지도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2000년 4월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발표됐다. 세계 각국에서 환영인사가 나오는 가운데, 클린턴은 직접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남북한 간의 직접 대화는 우리가 오랫동안 지지해온 것으로 한반도 문제 해결의 근본이다..... 대북 포용정책을 펼친 김대중 대통령의 지혜와 장기적 안목을 보여주는 증거다.”

 

2000년 6월 김대중이 게이조 일본 전 총리 장례식에 참석했다. 클린턴도 참석했는데 다른 나라의 회담 요청을 모두 물리치고 김대중만 만났다. 남북정상회담을 거듭 축하하며 “김 대통령이야말로 북한이 발전하도록 설득하고 돕는 데 가장 적절한 분입니다.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조그만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큰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고 말했다. 김대중에게 클린턴은 만날수록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

 

6.15 남북정상회담 선언이 발표되자 클린턴이 즉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역사적 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향한 희망적 첫발이다..... 나는 김 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추진하면서 보인 인내와 지혜에 박수를 보낸다..... 항구적인 평화와 완전한 화해를 향한 그의 장래 구상을 지원하게 되길 기대한다.”

 

김대중은 평양에서 돌아온 다음날 클린턴에게 전화해 정상회담 내용을 설명했고, 클린턴은 회담 성공을 축하하며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제기해준 데 대해 감사했다. 그리고 3일 만에 미국의 대북 제재 완화 조치가 발효되도록 했다. 50년간 금지됐던 북미 간 교역 및 금융 거래가 재개되도록 한 것이다.

 

2000년 10월 북한의 2인자로 불리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클린턴을 만나 김정일 친서를 전달했다. 클린턴은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을 언급했다. “김 대통령이 현 시점에서 북한이 적절하다고 판단할 만한 어떠한 형태의 접촉이라도 가질 것을 나에게 권유했다.” 김대중의 권유에 따른 클린턴의 평양 방문을 암시한 것이었다.

 

며칠 후 김대중이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클린턴이 직접 축하전화를 했다. 먼저 받게 되어 미안하다는 김대중에게 클린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김 대통령만큼 가치 있는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대통령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올브라이트 (Madeleine Albright) 국무부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게 될 텐데..... (나도) 북한에 가게 되길 바랍니다.”

 

2000년 11월 APEC 정상회담이 브루나이에서 열렸다. 김대중과 클린턴이 정상으로서 만나는 마지막 기회였다. 김대중이 클린턴 숙소로 찾아갔다. 부인 힐러리 클린턴의 상원의원 당선을 축하하며 클린턴의 방북을 다시 권유했다. 그는 검토 중이라며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답했다. 11월 7일 대통령선거가 실시됐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고어 (Al Gore) 민주당후보와 아들 부쉬 (George W. Bush) 공화당후보 사이에 승자가 결정되지 않아 누가 후임이 될지 모르는 어수선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클린턴은 김대중에게 ‘정이 가는’ 인물이었고, 김대중이 ‘참 좋아했다’. 그가 국제무대에서 사라진다니 참으로 서운했다. 둘은 서로를 회고하고 덕담을 나눴다. 퇴임 후에도 좋은 친구로 남자고 했다. 김대중은 “클린턴이 인간 자체로도 순진했다”며 다음과 같이 썼다. “ASEM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정상들이 앉아서 환담하고 있을 때였다. 클린턴 대통령이 종이와 사인펜을 가지고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알고 보니 정상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인을 부탁하고 있었다. 마치 초등학생이 유명 스타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의 순진함과 발랄함에 미소를 짓게 된다.

 

2000년 11월 대선 결과가 5주 후 12월 대법원에서 결정됐다. 아들 부쉬의 당선이었다. 클린턴이 김대중에게 ‘비밀전화’를 걸었다. “북한에 대해 대통령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북한 방문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대통령님과 그 대안에 대해 의논하고 싶습니다..... 1월 중 워싱턴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를 진행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김대중은 클린턴이 임기 중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어떻게든 매듭지어 달라고 부탁하며 협상방법까지 제시했다.

 

클린턴은 결국 12월 말 북한을 방문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가 김정일에게 미국 방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북한은 응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김 위원장이 초청에 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대통령의 공식 초청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만일 김 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했다면 관계정상화가 이뤄졌을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차기 부시 정권도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무산은 참으로 아쉬웠다. 나는 탄식했다. 단언컨대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에 갔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달라졌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 그 한쪽의 대통령으로서 정말 슬펐다.”

 

2000년 12월 김대중이 노르웨이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뒤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축하 영상이 방영됐다. 클린턴은 역시 다정다감했고 김대중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처럼 오랫동안 수많은 시련을 극복해야 했던 수상자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평생 자유를 위해 투쟁해왔던 만큼 수상은 당연한 것입니다. 과거 다른 수상자들처럼 그도 체포, 감금당했으며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원칙을 포기하고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으며 폭력과 기만에 같은 방법으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남다른 비전과 용기,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평화와 화합을 이끌어낸 공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2001년 1월 클린턴이 재임 중 마지막 전화를 했다. 한국전쟁 중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피난민 수백 명을 학살한 ‘노근리 사건’ 진상이 그 무렵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과 관련해, 클린턴이 성명을 통해 유감을 표했다며 거듭 매우 깊은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얼마나 대통령님을 존경하는지 알 것입니다. 내가 어려운 시기를 보낼 때 대통령께서 내게 보여주신 우정, 조언, 격려를 나는 대통령께서 상상하지 못할 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 당선자와 북한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북한과의 대화를 계속 원활하게 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퇴임 후에도 내가 도움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클린턴이 퇴임하고도 둘의 통화와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2001년 3월 김대중-부쉬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대중은 부쉬 측근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파악하고 다음날부터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만나거나 통화해 여론을 돌려놓기로 했다. 당연히 클린턴에게도 전화했다. 클린턴의 대북정책이 지속되도록 직설적으로 간곡하게 부탁했다.

 

김대중도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2003년 11월 클린턴이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했다. 두 전직 대통령은 남한-북한-미국 관계가 후퇴하는 데 대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특히 클린턴은 “내가 1년만이라도 더 대통령으로 있었더라면 북한 위기가 해결됐을 것입니다”고 했다.

 

2007년 9월엔 클린턴의 초청으로 김대중이 미국을 방문했다. 클린턴 정부에서 일했던 정치, 경제, 외교 분야 파트너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힘써달라고 호소하고 설득했다.

 

2009년 2월, 오바마 정부의 힐러리 클린턴 국무부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돌아가는 전용비행기 안에서 김대중에게 전화했다. 남편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시절에 대해 좋고 따뜻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며 다시 만나길 바란다고 전하는 안부 인사였다. 5월 클린턴이 세계기후 정상회의 참석차 서울을 방문해 김대중을 초청했다. 둘이 북핵문제와 6자회담에 관해 깊이 얘기했다. 오바마 (Barack Obama) 대통령이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겠다고 선언하면 북핵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김대중의 제언에 클린턴은 미국에 돌아가 아내 국무부장관에게 설명해 잘 진전되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김대중은 2010년 자서전을 펴내면서 다음과 같은 클린턴의 추천사를 받았다. “저는 민주주의 수호와 대북 화해 정책을 추진하면서 보여 주셨던 김 대통령의 용기를 통해 지금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낍니다..... 1992년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고, 한미관계 강화 및 우호 증진을 위해 그와 함께 일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일했던 수년 동안 김 대통령이 평화 증진과 서로 다른 문화의 이해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직접 보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용기 있는 민주주의의 투사였고, 인권과 평등의 수호자였습니다. 경제 위기로부터 한국을 구출하였고, 국가 안보를 증진하였습니다. 그의 업적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도 넘칠 만한 것입니다.....”

 

이희호 역시 김대중 못지않게 클린턴 부부를 좋아했다. 2008년 자서전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남편은 클린턴 전 대통령과 자별한 사이다. 클린턴이 2007년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 (CGI) 오프닝에 참석한 남편을 수많은 VIP 중 유일하게 언급하며 ‘나의 오랜 친구이며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고 결국 나라의 민주주의를 쟁취한 분’이라고 칭송했다..... 외국 정상들 사이에도 궁합과 코드가 있는 것 같다. 남편과 클린턴은 서로 잘 맞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APEC 같은 다자 정상회의에서 막간에 저만치 있다가도 고령이고 다리가 불편한 남편을 보면 일부러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또한 앉아 있다가도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등 연장자를 대우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4) 김대중과 부쉬 대통령

 

김대중은 2000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내심 앨 고어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랐다. 고어 후보는 클린턴 정부의 노선을 계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1월 7일의 선거 결과가 12월 12일에야 나왔다. 원치 않던 부쉬의 당선이었다. 그래도 축하 전화를 했다. 부쉬의 첫 인사는 좋았다.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해 김 대통령과 긴밀히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1년 3월 김대중이 부쉬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김대중은 공화당 행정부가 어떻게 맞을지 몰라 어느 때보다 긴장했다. 정상회담에서 부쉬는 먼저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만나 영광”이라는 덕담을 건넸다. 남한의 햇볕정책과 북한의 변화에 대한 김대중의 자세한 설명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 대통령님이 이룩한 남북관계 진전을 높이 평가합니다. 남북관계에서 김 대통령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합니다. 미국 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러나 김대중이 미국의 역할을 당부하자 북한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북한은 비밀에 싸인 나라입니다. 북한 정권의 성격에 대해 다소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선 외교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거친 표현들이 튀어나왔다. “나는 북한 지도자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이 모든 합의를 준수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북한이 각종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하며 이를 철저히 검증해야 합니다.” 김대중을 ‘이 사람 (This man)’이라 부르며 답변을 가로채기도 했다. 김대중은 매우 불쾌했다. 나이를 잘 따지지 않지만 그는 클린턴과 같은 22년 아래 아들뻘이었다. 부쉬 정부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 같아 불길했다.

 

김대중은 다음날부터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만나 여론을 돌려놓기로 했다. 전문가들과 기자들을 초청해 직접 대화했다. 의사당에서 열린 상하원 외교위원장 주최 간담회에 참석했다. 언론과 회견도 했다. 부쉬 행정부의 싱크탱크인 공화당 보수인사들과 식사도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다시 부쉬가 떠올랐다. 무례했고, 우리 국민들을 무시했다. 그에게 당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옳은 길로 가면 반드시 이긴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일정을 끝내고 아버지 부쉬에게 전화했다. 놀란 듯한 그를 에둘러 설득했다. 그는 김대중이 하는 일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주저 없이 알려달라고 했다.

 

2002년 2월 부쉬의 방한을 앞두고, 1월 그레그 (Donald Gregg)를 만났다. 1970년대 중앙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을 맡아 일본에서 납치돼 수장될 뻔했던 김대중을 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아버지 부쉬 행정부 때 1980년대 말부터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김대중과 남북관계와 부쉬의 대북정책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다, 부쉬를 설득하기 위한 방안을 제안했다. 격의 없는 ‘텍사스식 대화’를 하고, 부쉬를 휴전선으로 안내해 남북을 잇는 철도공사 현장을 둘러보게 하라는 치밀한 조언이었다.

 

2월 부시가 한국에 왔다. 김대중은 ‘혼신을 다해’ 2차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부쉬는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면서도 김정일과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다. 김대중은 미국의 전임 대통령들이 소련의 변화와 냉전 종식, 그리고 중국의 개혁개방을 불러온 사실을 설명하며 “젖 먹던 힘을 다해” 지극 정성으로 부쉬를 설득했다. 약속된 40분을 훨씬 넘겨 1시간 30분이나 단독회담을 진행하느라 확대 정상회담이 생략됐다. 부쉬는 만족한 듯 환한 표정으로 “솔직하고 대단히 유익한 대토론”이었다고 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햇볕정책을 지지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오후에 김대중과 부쉬는 도라산역에서 다시 만났다. 부쉬는 철도 침목에 기념 서명을 했다. 그리고 “나는 북한을 침공할 의도가 없다”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권고와 로널드 레이건의 성공 사례를 따라 나도 북한과 대화하겠다. 미국도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녁 만찬 자리에서는 도라산역 방문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다. 만찬 중에 김대중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웃으며, “대통령의 레이건 얘기, 오늘 낮에 써먹었습니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에겐 “김 대통령을 다시 봤다. 존경한다”고 했단다. 김대중은 부쉬가 믿는 감리교의 역사와 역할 등에 대해서도 깊이 얘기했다. 부쉬의 눈빛이 달라지고, 김대중에게 더욱 친근감을 표했다.

 

2002년 9월 부쉬가 김대중에게 전화했다. 곧 북한에 고위급 특사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10월 켈리 (James Kelly) 국무부차관보가 평양에 들어갔다. 켈리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HEU)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시인하며 “우리는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질 수 있다”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체니 (Dick Cheney) 부통령과 럼스펠드 (Donald Rumsfeld)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강경파들이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인정했다’고 몰아가며 북한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비난했다. 햇볕정책은 폐기되고, 제네바합의는 8년 만에 파기됐다.

 

김대중은 10월 APEC 멕시코 정상회의에서 부쉬를 다시 설득키로 맘먹었다. 김대중의 간곡한 호소에 부쉬는 북한에 대한 군사 공격 의도가 없다며 “나는 쌍권총을 아무 데나 쏘아대는 텍사스 카우보이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은 네오콘 (neoconservative)들의 입김대로 흘러갔다. 김대중은 이런 상황을 막아보려 온갖 노력을 했지만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2022년 6월 경기도 양주에서 미군 장갑차가 여중생 효순과 미선을 치어 죽이는 사고가 일어나고 촛불시위가 전개되자, 12월 부쉬가 김대중에게 전화해 직접 사과했다. “김 대통령과 한국 국민에게 깊은 애도와 유감의 뜻을 밝힙니다.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미군 수뇌부가 한국 측과 긴밀히 협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김대중이 2003년 2월 퇴임하고 한 달 뒤 3월 부쉬가 이라크를 침공했다. 부쉬는 전쟁을 선택하고, 미국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김대중이 5월 병원에 들어가 심혈관 확장 수술과 신장 혈액 투석을 받았다. 부쉬가 “과거 수십 년간 민주.인권 투쟁에서처럼 현재의 시련도 잘 이겨 내리라 믿습니다”며 쾌유를 기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2004년엔 2001년 정상회담 때의 일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마침내 사과하기도 했다.

 

이런 부쉬에 대해 김대중은 2008년 11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철학이 없고 자질이 부족한 극우 보수주의자인 부시 대통령 때문에 미국까지 포함한 세계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가..... 한반도 문제는 2000년 6.15 정상회담 이래 순풍에 돛 단 듯 순항한 것을 2001년 부시가 들어서면서 지난 8년 동안 엉망을 만들었다.”

 

그리고 2010년 자서전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부시 정권은 미국의 위상을 수직으로 추락시켰다. 오만은 개인에게도 독이지만 국가에게도 독일뿐이다. 부시 집권 시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재난 시대였다..... 교만으로, 힘으로 자신과 미국 그리고 세계를 망쳤다..... 부시 대통령의 8년 실정은 참담하다. 지구촌과 그 속의 인류에게 끼친 해악이 크다. 내정.외교 모든 분야에서 실패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제어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그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토록 우리가 문명과 이성을 발달시켰어도 지도자의 잘못 하나 바로잡을 수 없음이 속상하다.”

 

이와 관련해, 나는 부쉬가 2003년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판과 반대를 무시하고 이라크를 침공할 때부터 즐겨 써온 말을 덧붙인다. “부쉬의 호전성과 일방주의가 미 제국주의 붕괴를 수십 년 앞당길 것이다.”

 

 

4. 김대중에 대한 미국 지도자들의 역할과 평가

 

김대중은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을뿐만 아니라 학자이며 이론가였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다. 1960년대 국회의원일 때부터 기자들 사이에서 “김대중 의원을 만나려면 국회도서관으로 가라”는 말이 나돌았다. 1970-80년대 6년간 감옥에 갇혀서는 하루 10시간 이상 책을 읽었단다. 감옥이 ‘큰 대학’이었던 것이다. 왕성한 독서에 따른 풍부한 지식으로 미국의 학자, 관료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화와 토론으로 친분을 쌓으며 그들의 도움과 자문을 받았다. 김대중에 대한 미국 지도자들의 역할과 평가를 소개한다.

 

1) 대학교수들

 

1960년대 주일대사를 지낸 라이샤워 (Edwin Reischauer) 하버드대학 교수는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후보로 지방자치제를 주요공약으로 내걸 때 큰 영향을 미쳤다. 1973년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됐다 살아 돌아오자 하버드대학 초청장을 마련해 미국행을 주선하기 위해 김대중을 찾아왔다. 김대중이 1983년 미국에 망명하자 하버드대학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지내도록 하고 미국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코헨 (Jerome Cohen) 하버드대학 교수는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후보로 미국을 방문하자 케네디 상원의원과 풀브라이트 상원외교위원장 등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일본에 머물던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즉각 키신저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에게 “우리의 친구 김대중 씨가 일본에서 납치당했다고 한다. 몇 시간 안에 그가 처형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를 살려야 한다”고 연락했다.

 

베이커 (Edward Baker) 하버드대학 교수는 1994년 김대중이 아태평화재단을 만들 때 언론인 해리슨 (Selig Harrison)과 미국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김대중이 상대방의 지식과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흡인력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김대중이 지식을 마치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며 흠모했다.

 

1980년대 출판한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으로 널리 알려진 커밍스 (Bruce Cumings) 시카고대학 교수는 김대중이 1985년 미국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할 때 동행했다. 전두환 정권의 반대와 위협에 김대중의 신병을 염려해, 의원, 종교지도자, 기자 등 30여명과 ‘인간 방패’를 자청한 것이다. 김대중의 대북정책을 지지하고 자문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햇볕정책이 통일을 위한 최선의 전략이라고 본다. 거기에는 미국의 지지가 필요한데 그 지지는 1998-2000년 사이에 있었다가 부쉬 취임과 함께 증발해버렸다.”

 

2) 관료들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내다 1960년대부터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부장관 등을지낸 키신저 (Henry Kissinger)는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후보로 선출될 무렵부터 그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있었다. 1973년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코헨 교수의 연락을 받고 모든 조직을 동원해 진상을 파악토록 지시해 김대중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대중을 20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자문했다.

 

그레그 (Donald Gregg)는 1970년대 중앙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1973년 일본에서 납치됐던 김대중을 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대중이 1980년 사형선고를 받자 서울을 방문해 전두환을 만나 김대중을 처형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훗날 김대중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50여 년간 아시아와 관련된 일을 해오면서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 3명이 김대중과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였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

 

루빈 (Robert Rubin) 클린턴 행정부 재무부장관은 김대중이 1990년대 말 외환위기의 IMF 체제에서 놀랄 정도로 빨리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그를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라 부르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국경제 회복의 영웅인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동료들은 경제적 애로에서 벗어나는 데 건전하고 용기있는 정치 지도자가 얼마나 크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올브라이트 (Madeleine Albright)는 조지타운대학 국제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클린턴 행정부에서 미국의 첫 여성 국무장관으로 일하며, 김대중의 영향을 크게 받고 평양을 방문하는 등 북미관계 진전에 힘썼다. 김대중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 싸우다 27년 감옥생활을 한 뒤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고 1998년 흑인 최초 대통령이 됐던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3) 기타 전문가들

 

김대중이 1981년 감옥에 있을 때 토플러 (Alvin Toffler)의 ≪제3의 물결≫을 읽고 너무 감동 받아 아들들에게 이 책을 꼭 읽으라고 권유하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래학자’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김대중 집을 찾는 단골손님이었고, 김대중은 그를 만날 때마다 묻고 또 물었다. 김대중이 지식정보 강국을 건설하는 데 영감을 주고 안내자 역할을 한 토플러는 2001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이미 세계 수준의 정보화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제3의 물결’ 흐름에서 이제 한국이 쫓아갈 검증된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이츠 (Bill Gates)는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로 김대중의 사이버 세상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김대중의 정보화 사업에 토플러가 영감을 주었다면 게이츠와 일본의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은 구체적 방법과 정보를 알려주었다. 2001년 서울을 방문한 게이츠는 “한국은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초고속망을 구축했고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도 세계 최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5. 김대중을 기리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김대중이 클린턴 함께 집권했던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간은 역사상 남한-북한-미국 관계가 가장 좋았다. 미국이 남한의 대북정책을 존중하고 뒷받침하는 등 우호적 분위기에서 남한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최초의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클린턴이 처음부터 평화지향적이거나 북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1993년 대통령으로 취임해 김영삼 정권과 함께 북한 핵무기 개발에 강경 대처했다. 그해 텔레비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사용하면 우리는 압도적으로 보복할 것이다. 그건 그 국가의 종말을 의미한다.” 1994년엔 앞에서 얘기했듯 북한을 폭격할 뻔했다. 1996년 판문점을 방문해서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핵무기 개발을 지속한다면 그들 국가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국가의 종말 (the end of their country)’이라는 끔찍한 말을 미국과 한국에서 연이어 던진 것이다.

 

이렇게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클린턴이 평화 지향적으로 변한 것은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의 핵무기 개발 상황이 변해서가 아니다. 남한 대통령이 김영삼에서 김대중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를 진전시키며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남한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부질없는 일이지만 나는 이글을 쓰면서 몇 번이나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이나 한탄을 쏟아낸다. “만약 김대중이 1992년 당선돼 5년 임기를 모두 클린턴과 함께 보냈다면.....” 또는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의 친구 고어가 당선됐다면....”

 

우리는 김대중 같은 지도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꼭 그렇게 되길 간절하게 기원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미국이 유럽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에 이어 아시아에서 중국과의 전쟁으로 치달으며 남한을 압박하는 가운데, 남한은 미국을 추종하면서 북한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북한은 남한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2022년, 다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