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옻칠나전연구소 임충휴 대표, 제31회 올해의 베스트 인물 대상 ‘전통공예 명장’ 부문 수상
명장옻칠나전연구소 임충휴 대표, 제31회 올해의 베스트 인물 대상 ‘전통공예 명장’ 부문 수상
  • 이승현 기자
  • 승인 2024.04.3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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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옻칠나전연구소 임충휴 대표

명장옻칠나전연구소 임충휴 대표가 지난 26일 서울 시청역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31회 올해의 베스트 인물 대상’ 시상식에서 ‘전통공예 명장’ 부문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1965년 나전칠기 분야에 입문한 이래 오로지 외길만을 걸어온 장인이다. 다음은 임 명장과의 일문일답.

- 전통공예를 입문하게 된 계기?

전남 완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상경하여 서울 살이를 시작하였다.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아 인천의 라이터공장에 들어갔다. 그렇게 일하던 중 성실함을 인정받아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바로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이렇게 칠기와 인연을 맺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밑바닥 생활 3년을 보냈다. 하지만 먹고 자는 것보다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바로 바닷가에서 흔히 보던 조개껍질이 고급스러운 장식물로 변화하는 모습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마주한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다. 나고 자란 고향에서 지천에 널린 것이 전복 껍데기였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던 것이 가공을 거쳐 이렇게 아름다운 자개로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이후 칠기일은 천직이 됐고 고단한 세월을 묵묵히 견뎌 대한민국칠기명장 제384호로 ‘명장’ 칭호를 얻게 되었다.

- 명장님의 인생철학, 인생역정, 비전 소개?

어릴 적 처음 상경한 뒤 서울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쳤다. 다시 서울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또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을 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이나 타야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뱃머리에 서서 아버지의 말씀을 곱씹었다. 그 날부터 인생의 굽이굽이 걸림돌을 만날 때 마다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고 그 덕에 지금의 그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여전히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인내)라는 글자가 걸려있다.

그렇게 상경하여 나전칠기를 만났다.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휴일은 한 달에 한번,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주었다. 3년간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보며 월급도 없이 적은 용돈만 받으며 일한 끝에 드디어 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로서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후 긴 시간 악착같이 기술을 갈고 닦으며 어엿한 기술자가 되었고 가정도 꾸리게 되었다.그러던 중 또 인생의 중요한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태생이 서울이고 금융업에 계셨던 이 지인과의 인연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어머니는 이 지인의 댁에 일을 도와주러 다니고 계셨고 새해를 맞아 세배를 갔던 이 댁에서 좋은 기술을 두고 가정도 가진 사람이 왜 독립을 하지 않느냐는 말씀을 들었다. 그럴만한 돈이 없다고 말씀 드리니 바로 독립자금 300만원을 대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을 지키는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던 이 분의 도움으로 이렇게 자신의 공장을 처음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공장을 운영해 나가면서 신용을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생각했다. 또한 이는 인생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인연을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되었다.

이렇게 직원 네 명을 포함해 다섯 명이 시작한 공장은 사대부 집에서 쓰던 작은 경대, 서안부터 시작해서 점점 문갑, 장롱 등 큰 물건을 만들어가며 성장했다. 당시 9자 장롱의 가격은 서울 변두리 집값보다 큰 금액이었다. 누구나 갖고 싶어했고, 부의 상징이었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작업장에는 어느새 직원이 넘쳤다. 제대로 된 9자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 80년대,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굴지의 대기업 건설사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들어갈 병풍 두 개를 주문 받아 만들기도 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 뿐 아니라 전국 번화가와 백화점까지 나전칠기 가게가 즐비했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시기 1997년 IMF가 찾아왔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은 줄줄이 부도가 나서 받지 못한 돈이 많았다. 감당하기 힘든 큰 금액이었다. 그로 인해 나전칠기 업계의 90% 이상이 빚더미와 함께 사라졌다. 17세 때부터 함께 옻칠나전 일을 해 오던 13명 동무들도 모두 업계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믿고 따라준 거래처,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직원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처분하여 갚을 것들도 다 정리하고 직원들에게도 얼마간이나 챙겨 주었다. 이렇게 칠기와는 인연을 끊고자 했다.

그러나 돈도 잃고 손에 남은 것이라고는 배웠던 나전칠기 기술이 전부였던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천직으로 여겼던 나전칠기를 놓을 수 없기도 했고 주변의 만류도 컸기에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진성옻칠공예(현 명장옻칠나전연구소)를 다시 일으켰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며 초심으로 돌아가 전통 제작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하였다. 기본적인 제작공정은 25단계,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려면 수만 번의 손길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작품에 따라 완성하기까지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넘게 걸리는 것도 있다. 주변에서는 ‘괜한 고집을 부린다, 고지식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으로 큰 작품들을 만들게 되었고 유럽 등지로 전시를 다니고 외국에도 작품이 팔려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긴 시간, 공방을 거쳐 간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지만 현재까지 일을 하는 사람은 5명 정도다. 그만큼 힘든 일이다. 그래서 젊은 후배들과 얼굴을 대할 때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을 강조한다.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이론과 기술을 연마하고 견디면 반드시 빛을 발할 때가 온다. ‘남들은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라고 하지만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이 곧 전통을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대표작은 12자 금장 십장생 장롱, 주칠 당초무늬 장식대, 선유도 장롱 등이 있다. 임 명장은 대한민국 옻칠공예작품공모전 금·은상 수상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특별상(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고 2014년 ‘전통나전옻칠공예’ 책자를 저술한 것을 계기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 명예학과장을 맡는 등 옻칠나전공예의 보호육성과 전수·전승을 위하여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현대미술대전 대상 수상을 비롯해 전승공예대전 및 동아공예대전 등에서 20회 이상 입상했으며, 서울정도 600주년 기념특별전 등 10여 차례 국내외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이외에 공예품대전, 나전칠기공모전, 국제전통예술대전, 대한민국 원주옻칠공예대전 운영위원장 및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2006년 이후로 대한민국 명장회 부회장을 현재까지 역임하고 있다. (사)한국나전칠기보호육성회로부터 2회 표창을 받았고 2015년 대한민국 국무총리 표창, 2018년 대한민국 노동부장관 표창, 2018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문화재부문을 수상하였다.